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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한담

고구마 수확하면서 생각나는 추억,

by 扁宜雪裏不爭春 2020. 10. 7.

 

그제, 105일 날 고구마를 수확했습니다,

 

워낙 상 농사꾼이라서 인 지, 가장 크다는 고구마 사진인데도 별로 크게 보이지 않는데요,

 

2~3평 농사에 20kg 쌀자루로 하나 가득 캤으니, 나름 성공했나요?ㅎㅎㅎㅎ,

 

심어만 놓고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더니, 수확이라고 해 놓고 보면서 실소만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고구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즘 너도나도 너무 먹어대다 보니, 아랫배들이 올챙이가 되어 나오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유년시절, 그러니까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우리 모두 가난했던 시절부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요,

 

그런 제가, 요즘처럼 배부른 세상에서 갑자기 좋아할 리가 없겠지요,

 

꼴랑 20kg 한 자루를 캐 놓고서도, 아무도 먹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누구에게 떠넘길까? 고심하다가,

 

마침 대전 가는 길에 막내동생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갇다 주고 말았는데요,

 

그런 제가, 해마다는 아니지만 기회만 있으면 심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구마는 거의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이, 고구마 줄기는 아주 좋아하거든요,

 

한번 살짝 삶은 다음 양념장에 된장 조금 넣고 버무려 먹는 맛도 괜찮지만, 가장 장점이라면,

 

육류나 어류 패류 등 어느 음식재료와도 종류 불문하고 잘 어울린다는데 있습니다,

 

살짝 삶은 고구마 줄기에 돼지 살코기 넣고 찌개 끓여도 괜찮고,

 

살집이 많고 기름진 어류나 살집 적은 어류 불문코 같이 끓여도 궁합이 잘 맞습니다,

 

중 대형 새우나 바지락 대합등 패류도 그런대로 먹을 만 한데요,

 

여름철에서 부터 요즘 수확직전까지도, 고구마줄기가 올라오는 족족 잘라서 음식재료로 이용하게 되다보니,

 

땅 속 고구마가 굵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요즘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고구마 줄기에 붙은 껍질 벗기기 귀찮아서 멀리하는 것 같지만,

 

고구마 줄기는 바로 조리에 들어가는 식품이 아닙니다,

 

한 번 삶은 다음 물을 버리고 조리에 들어가는 고로, 굳이 껍질 벗기지 않아도 되거든요,

 

덕분에 식이섬유도 많아져서 변비에도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고구마는 모두 갇다 주고 말았을지라도, 고구마 줄기는 하나도 주지 않고 삶아서 냉동시켜놓으니,

 

겨울철 반찬거리는 조금이나마 해결되지 않았나 싶은데,

 

고구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제 유년시절 이야기 하나 올립니다,

 

저희 친가나 외가 쪽 모두 상당히 장수하는 집안인데,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기에 어머니 손잡고 증조외할아버지를 뵈러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증조외할아버지가 90이 다 되신 것 같은데 상당히 정정하셨지요,

 

손녀딸인 어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어린 저의 손을 잡고 뵈러가는 일이 많았는데,

 

가는 길에, 상당히 높은 산이 하나 가로막고 있었지요, 하지만, 쉽고 빠른 지름길도 있었는데, 그것은,

 

기차가 다니던 터널이었습니다,

 

높은 산을 넘어가느냐, 아니면 쉽고 빠른 길로 가느냐의 선택은, 기차시간에 따라 달랐습니다, ,

 

터널 속을 지나다가 기차를 만날 시간 같으면 산으로 올라가고,

 

반대일 것 같으면 터널로 들어섰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한 선택이었습니다,

 

한번은 터널 속에서 기차를 만나는 끔찍한 경험도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의 터널 속에는 위급한 상황에 대비한 홈이 파진 곳이 있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서

 

위기를 넘긴 기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현재는 모두 널찍한 도로가 뚫려서 불과 10 몇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만 해도 길이라고는 겨우 사람 하나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 전부였는지라,

 

아무리 빨리 걸어가도 2~3시간은 족히 걸리는 머나먼 길이었기에,

 

같이 가자고 꼬득이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기가 싫었지만,

 

증조외할아버님이 주시는 10원짜리 지폐 한 두 장이 눈에 어른거려서,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가기는 하는데, 가장 싫어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제가 사는 동네는 널찍한 평야지대였지만, 증조외할아버님이 사시는 동네는 산골이라,

 

논이 부족한 동네에서 쌀 대체작물로 심는 것이 바로 고구마였고,

 

제가 가면, 주식이나 간식으로 고구마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는 것입니다,ㅎㅎㅎㅎ,

 

문제는, 집에서는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고구마 인지라,

 

먼 길을 걸어와서 배가 고프기는 한데, 도무지 손이 가지 않는다는데 있었지요,

 

지금만 같았어도, 내놓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서 조금이나마 먹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인데,

 

아예 눈도 떠보지도 않고 있으니, 음식 내놓는 쪽에서 보면 얼마나 민망하고 얄미웠을 것인지?

 

그 후 50년이 한참 지난 지금에도, 철없던 당시의 일만 생각나면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당시의 증조외할아버님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6.25 전쟁 통에 남편 잃은 딸(제게는 이모할머니?), 딸이 낳은 자식들 3명을

 

이제껏 노구를 이끌고 먹여 살리는 상황이었거든요,

 

긴 장죽을 재떨이에 땅땅 두드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내놈 입이 저렇게 짧아서야,.....”

 

남자는 나오는 음식이 무엇이 되었든 가리지 않고 잘 먹어야 하는데 증손자 놈 입이 너무 까다롭다, 는 말씀입니다,

 

ㅎㅎㅎㅎ, 하지만,

 

그렇듯 역정을 내시기는 했을지라도, 아끼는 증손자 놈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다음 끼니에는 보리쌀이 많이 섞였을지라도 밥이 나왔지요,

 

그때의 배고픈 상황은, 먹을 것이 썩어나는 지금 시대에서는 먼 옛날의 동화 속 이야기 같겠지만, 당시만 해도,

 

어느 동네에서는 춘궁기를 넘기지 못하고 아사한 집이 있다더라, 는 흉흉한 소문들이 심심치 않게 나도는

 

그런 험난한 시기였기에, 그때의 제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너무나 죄송스러울 뿐이지요,

 

90이 가까운 연세에도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고 정정하셨던 모습은,

 

늦게 본 자식(이모할머니)과 그 자식이 낳은 3남매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먹여 살려야겠다 는

 

책임감과 오기의 표현은 아니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만 든답니다.

 

그렇듯 어려운 삶을 이어가셨던 외증조외할아버님은 오래 전에 떠나시고,

 

어머니 연세와 불과 몇 년 차이로 증조외할아버지가 늦게 낳아서 고생하고 돌보셨던 이모할머님도,

 

2년 전에 떠났셨는데요,

 

무정한 세월은, 어느덧 저도 떠나야 할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아, 뒤돌아 보는 세월이 안타깝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