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통령 중국방문, (삼전도의 굴욕을 잊어버린 민족)
왜나라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당시의 동북아 정세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전란입니다,
침입 당사자인 왜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으면서 도꾸카와 이에야스 막부시대가 열렸고
조선을 지원하면서 국력이 쇠락해버린 명나라는,
그 사이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후금의 누르하치가 공격을 시작했으며,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서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합니다, 선조의 죽음으로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은,
왜란시에 받은 지원도 있기에, 마지못해 강홍립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도,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일어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면서,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합니다,
당시의 누르하치는, 조선보다는 명을 치는것이 급선무였기에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되는데,
반정으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에 주둔하면서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의 명나라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씁니다,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는데,
광해군을 몰아낸 보복을 한다는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합니다,
소위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는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 의사를 표시했는데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형제의 맹약을 맺을것과 쌍방모두 압록강을 넘지 않기로 하는등,
몇가지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은 계속 이어가면서, 국력배양에 주력하는데 위협을 느낀 후금은, 1632년,
형제의 맹(兄弟之盟)에서 '군신의 의(君臣之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과, 이에 따르는 많은 공물를 요구하는데,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공물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지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후금과의 관계를 끊기에 이르게 됩니다,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태종은, 다시한번 사신을 보내 신하되기를 강요하였지만,
이를 거부한 조선에,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한 것입니다,
병자호란에 대해서, 요 근래 언젠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던데요,
국산영화를 잘 보지 않은 사람인지라, 영화의 주 내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되,
우리의 5000년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이 연출된 것은,
초등학교만 다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데,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강력하게 응징해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주전론이 맞섭니다,
대표적인 주전론자들은 소장파로, 조경(趙絅), 김상헌(金尙憲), 유계(兪棨)등이었으며,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등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은 주화론을 내세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주전론자들이 힘을 얻어, 청나라의 위협을 무시하고 말았는데,
결과는, 1636년 12월, 12만명을 이끈 청나라 대군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12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이틀 뒤에는 개성을 점령하고, 수도였던 한성으로 몰려오는데,
이에 남한산성으로 도피한 인조는 항전을 거듭하였지만,
지원군과 식량이 끊기면서 피신한 지 48일 되는 날, 삼전도에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했는데
이를 두고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하지요, 결과로는, 군신의 맹약을 하면서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등, 소위 3학사를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고,
후에 세자와 봉림대군등은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3학사들은 살아서 조선의 땅을 밟지 못합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라서,
검색만하면 누구나 알수있는 벙자호란에 관한 대강의 글을 올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방중한 문대통령에 대해서 국내외 신문매체들의 떠들어대는 홀대론의 시초가,
어느부류 누구때문에 이런 황당한 상황이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 올리는 글인데요,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나라 쥐새끼 부류들은 380년 전 삼전도의 치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인간문명이 절정에 이르러, 소국이나 빈국들의 발언이 커진 21세기에도,
국토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은 나라는 큰 나라의 눈치를 보기 마련인데, 약육강식의 그 당시 상황에서,
누구를 믿고, 한참 힘을 얻고있는 청나라에 도전을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명분은 차고 넘칩니다, 명나라를 상국으로 칭하는 수구들의 오기와 고집, 그리고 충성심인데요,
위 글에서 언급한 대로,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를 읽지못한 소위 척화론자들은,
임진년 전쟁에서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자고, 충성 충성하다가 청태종에게 당한 것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병자호란은 끝끝내 척화론을 고집한 사람들만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욕심없고 순박했던 백성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했다는 것인데,
오기와 고집으로 척화론을 부르짓던 3학사들은 후세에 이름이라도 남겼지만,
이들의 고집으로, 아무 힘도 없이 당하기만 했던 수많은 이름없는 백성들의 한은 어디에다 풀어야 할까요?
문제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닌듯,
수 백년 전 삼전도의 치욕이, 21세기인 오늘에 와서 재현되고 있다는데 있는데요,
당시의 치욕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 한 것이지만 가장 문제는,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오기와 고집으로 일관했던 당시의 임금인 인조나 조정대신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의 정세와 대입해 본다면, 오로지 미국만을 상전으로 받들어 모시는 쥐새끼 무리들과.
6,25때 도와준 미국의 은혜를 잊지못해서, 데모하는데 쌩뚱맞게도 성조기나 흔드는 무식층들이,
그 옛날 삼전도의 치욕을 재현하고자 발악을 하는데, 그 결과물이 사드배치 일 것입니다, 물론,
흙이나 파먹고 살아가는 무식한 농사꾼이라, 사드배치의 당위성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배치하고 싶어 안달이 난 미국과, 막아보고자 발악을 한 중국측을 상대로,
두 강대국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는 최고의 정치 요리재료가 바로 사드였으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구사하던 광해군의 외교술이 절실히 필요했던 상황에서,
공명심에 불탄 쥐새끼 한마리가, 뒷구멍으로 사드 들여오면서
오늘의 이 나라를, 굴욕외교를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막장 상황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인데,
더구나 이런 막다른 상황을 만든 쥐새끼는 지난날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것을 보면서,
이 나라의 배웠다는 것들 중에는, 겉모습만 인간이면서 생각없는 짐승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세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 마지막으로,
권한도 없으면서 정권공백기를 틈타 뒷구멍으로 사드 들여 온 김관진이라는 쥐새끼, 반듯이 처벌해야 하며,
국내외로 엄중한 상황을 무릅쓰고, 중국방문을 추진한 문통에게 많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